본문 바로가기

예?술?

나는 기억한다

-소년기-

나는 기억한다. 도서관 책장에 ‘밤'이라는 책이 거꾸로 꽂혀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달세가 밀려 부모 없이 혼자 집을 나와야했던 옆 반 달림이의 반지하 하숙방이. 그 아이가 집 주인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내며 통화하던 것과, 지나치게 밝은 조명에 드러나던 방안의 모습이. 20L 짜리 쓰레기 봉투에 옷가지와 팬티와 스타킹을 쑤셔박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쓸린 상처가 딱지가 되어가던 여학생의 종아리를.

나는 기억한다. 석양으로 노랗게 물든 커튼을.

나는 기억한다. 자기 입냄새를 맡아보던 나의 남자 짝궁을. 

나는 기억한다. 교실에서 농구공으로 내 안경을 부러트린 남학생을. 괜찮다며 머리칼을 헤집었더니 불 같이 화를 내었고, 그 후 그 남학생의 누나로부터 저질스러운 욕을 들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복도를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교복 치마를 슬쩍 들어올리던 단발 머리의 여학생을. 

나는 기억한다. 안개 낀 운동장을 둘 씩 짝지어 걷던 학생들을. 

나는 기억한다. 운동장 모서리에 심겨있던 작은 사과나무들을. 그 나무에 열리는 사과들은 작았고, 어느 해 부터인가 사과가 열리지 않았다.

나는 기억한다. 음악실에서 상기된 얼굴로 허둥지둥 나오며 인사를 건네던 두 명의 여자 상급생들을.

나는 기억한다. 내 책상에 올려져있던 젖소 모형을.

나는 기억한다. 같은 반 여자아이의 귀에 종유석 처럼 동그란 것들이 달려있던 것을. 그 아이의 이름이 베아트리스였던 것과, 머리는 옅은 갈색이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마른 여학생의 팔이 팔꿈치를 기점으로 바깥으로 휘어진 것을.

나는 기억한다. 쉬는 시간, 책상 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던, 쌍둥이 같던 여학생 두 명을.

나는 기억한다. 교무실 프린터에서 고양이를 찾는 전단지가 출력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가 빗자루 손잡이로 내 눈알을 파내는 시늉을 하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여동생의 목을 조르던 내 오른손의 엄지 손가락을.

나는 기억한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츄파춥스를 사서, 서로의 입안에 든 것을 뺏어 먹던 친구들을. 침으로 번들거리던 딸기우유 맛 사탕의 머리 부분을.

나는 기억한다. 요정과 귀신 사진을 찍으려고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 앞에서 숨죽여 안을 살피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스포츠 신문 뒷면에 실린 야한 소설을. ‘여섯 번 째 손가락’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기억한다. 첫 생리의 낯선 고통으로 괴로워 할 때, 누워있는 나의 모습이 마치 유체이탈을 한 듯 3자의 시선으로 보였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밤 새워 반 스타킹 양말에 줄무늬를 그리던 것과 옷에 구멍을 뚫고 고리를 달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할로윈 파티가 한창이던 날을. 교내 식당의 조명이 차갑고 밝은 파란색이었던 것과, 나와 함께 앉아있던 같은 반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던 엉거주춤한 자세를. 

나는 기억한다. 아무도 없는 로비에서 보았던 성 베네딕트 조각상을. 

나는 기억한다. 뒤집어진 멜빵을 원 위치로 돌려놓던 손가락을.

나는 기억한다. 넥타이를 조금 당겨 풀어놓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주름을 없앤 교복 치마의 팽팽함과 약간 반짝이는 스타킹이 이어지던 은은한 곡선을.

나는 기억한다. 밀대 손잡이를 배에 댄 상태로 축 늘어져 바닥을 걸레질하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후문 앞 개고기집을. 입구 앞에 둔 솥에서는 항상 허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기억한다. 도서관 건물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있던 중고생들을.

나는 기억한다. 버스 안에서, 내 어깨에 기대라고 했더니 무섭게 화를 내었던 사랑이를. 

나는 기억한다. 사랑이가 내게 힘내라고 보냈던 문자메세지를. 

나는 기억한다. 때가 묻어 안쪽이 누래진 셔츠 칼라를.

나는 기억한다. 반듯하게 필기를 하다가 약간 비뚤어진 탓에 온몸이 경직된 현지를. 

나는 기억한다. 뒷문 거울 옆에 물방울 무늬나 별똥별 무늬, 손자국처럼 남겨져있던 화장품들의 흔적을.

나는 기억한다. 중2 때부터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고 자랑하던, 버스 앞자리에 앉았던 다솜이를. 

나는 기억한다. 늦게 하교하던 날, 카메라를 숨기고 후문으로 들어온 방송국 사람들을. 여성 청소년들의 과도한 다이어트로인해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나 유행하던 결핵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다. 뒤에 멀뚱히 서있던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가방 속에 카메라가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늦게 내린 비로 쫄딱 젖은 캠프 파이어용 나무들을. 

나는 기억한다. 체육관 연단에 있던 내가 아래로 뛰어내리고 소리치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모의고사를 치르던 중 창 밖의 바바리맨을 보고 우르르 몰려가던 같은 반 학생들의 뒷모습을.

나는 기억한다. 점심 시간에 엎드려있는 나를 그대로 두고 식당으로 간 현지를. 

나는 기억한다. 현지의 남자친구를 기다리던 학교 옆 수풀이 우거졌던 공터를. 

나는 기억한다. 현지, 진현이와 함께 야간자율학습 시간 쉬는 시간에 편의점에서 사먹던 요플레를.

나는 기억한다. 엘레베이터 앞에서 이모가 죽었다고 말하던 엄마의 눈꼬리와 입꼬리를.

나는 기억한다. 제주도 수학여행 때, 나에게 왜 보현 선배의 소식을 알리지 않았냐며 책망하던 진현이의 푹 숙인 고개를.

나는 기억한다. 엉킨 채로 꽁꽁 얼어붙었던 머리카락을.

나는 기억한다. 달림이의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하던 아빠의 무서운 목소리를.

나는 기억한다. 달림이의 가닥 가닥 브릿지가 들어간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카락을.

나는 기억한다. 달림이가 집 앞으로 찾아와 놓고갔던 팬티를 내놓으라며 현관문을 발로 차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가구가 빠지고 텅 빈 집안에 숨어있던, 울퉁불퉁한 벽지 위에 잔뜩 그려져있던 낙서들을.

나는 기억한다. 밝은 빛이 들어오던 수학여행 숙소에서, 여럿이서 포즈를 취하고 찍었던 사진을.

나는 기억한다. 여름 방학,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봉투에 담아 우리를 찾아왔던 보현 선배를. 

나는 기억한다. 책장에서 책을 뽑아들고, 이 순간을 기억하자고 마음 먹었던,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날의 한 순간을.

 

-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66680996?query=%EB%82%98%EB%8A%94%20%EA%B8%B0%EC%96%B5%ED%95%9C%EB%8B%A4&NaPm=ct%3Dlk0rzt2g%7Cci%3Dc46976197370053db2c15a2cf95be9de429f700b%7Ctr%3Dboksl%7Csn%3D95694%7Chk%3D5ee72051cf3eb0333687cf09c677e48d4a600af5 

 

나는 기억한다 : 네이버 도서

네이버 도서 상세정보를 제공합니다.

search.shopping.naver.com

 

<나는 기억한다> 조 브레이너드

 

신해욱 선생님 수업에서 이 책 처럼 써본 것.

생각보다 기억의 파편들이 너무 선명하고 마구잡이로 와장창 떠오르더라. 

그리고 재미있는건 내가 10대 시기를 대부분 3인칭 시점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인생 최악의 시기라 여러번 곱씹어서 그런건지.

다 써놓고 보니 뭔가 말이 되는 듯 안되는 듯 장면들이 마찰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면서 뭔가 느낌이 생겼다.

퇴폐적이고 관능적이라는 평을.. 들어서 의외였고 재미있게 읽어주신 것 같아서 기부니 좋았다. 

막상 쓰려니까 아무것도 기억 안나는데 '나는 기억한다' 를 타이핑 해두고 어느 시기나 장소를 정해두면 그 때부터 봇물 터지듯 와랄라 떠오른다. 

재미있으니 유년기/소년기/청년기/장소별로 다 써 볼 계획 ㅎㅎ 한두시간정도는 순삭.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벼운 물체를 무겁게 하기  (0) 2023.03.16
규칙성과 익숙함과 얘술  (0) 2023.02.05
예술가가 되는 시간은  (0) 2022.10.20
예술가가 되는 시간은  (0) 2022.10.20
돈 벌 수단의 무서움  (0) 2022.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