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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옷 사기

방금 2년 전에 당근마켓에 올려둔 버쉬카 데님 바지를 만원에 팔고 오는 길이다.

내 의류 소비 습관은 진짜 개똥이다.
세일할 때나 쿠폰 있는데 안 사면 손해보는 거 같고 하나 잘 맞는다 싶으면 몇 벌 더 사기도 하고 제품이 뭔가 독특하다 싶으면 엄청 사고싶다. + 충동구매

약 5년 전 버쉬카 바지를 하나 사서 입어보고 나한테 딱 맞는 것 같아서 한 벌 더 샀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러고나서 원래 입던 바지도 그 뒤로 다시는 안 입었다. 지금은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괜찮아보이는 상의가 쿠폰 써서 3만8천원 정도였는데 그 쿠폰을 꼭 쓰고 싶었고 그 옷의 그 핏을 다른 데서 찾기 어려워서 블랙이랑 아이보리 두 벌을 샀다. 블랙은 잘 입는데 아이보리는 시착해 본 후 부각되는 거대한 팔뚝살 때문에 옷장에 처박았다.

이 외에도 문제점은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 옷을 입은 나의 현실적인 모습을 잘 상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위의 블랙 상의도 내가 긴 머리였으면 괜찮았겠지만 숏컷인 지금은 일자목에 라운드숄더가 너무 드러나서 그렇게 잘 산 템도 아니게 됐다.
이런 식으로 텍도 안 뗀 자라 옷이 존나 많다.

나는 어릴때부터 한 5년 전까지는 말라깽이였던데다 긴 헤어스타일을 고수했었고 노골적인 섹스어필에 미쳐있던 외로운 청년이었다. 글구 며칠씩 술처먹고 옷 안빨아도 티 안나는 검은 색만 입었다.
그래서 의외로 옷이 별 필요가 없었다.
낼 모레 서른인 지금은 나만 신경쓰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소재나 신체적 특징에 맞는 디자인 등에 유의하게 되었다. 이게 골치임.

어릴 땐 패숀의 목적이 하나였으니 어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리도 길어보이고 싶고 굽은 어깨도 가리고 싶고 팔이 짧은 것도 안들키고 싶다. 하나같이 내가 후천적으로 바꾸기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내 인생에 중요한가? 땡! 그렇지 않다.
욕망하는 대상도 모호하다. 전자의 패션은 그냥 날 보는 모든 인간들이 대상이었고 후자의 패션은 나를 보는 ‘나’가 대상이 된 것 같다. 결국 자기만족은 맞는데 패션에 일가견이 하나도 없는 나로서는 너무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가 아닌가 싶다.

어제는 버리려고 내어둔 니트 후드티가 생각나서 모자를 떼어 바라클라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근데 노동력에 비해 결과물이 처참해서 진짜 개빡쳤다. 자갈치 과자처럼 됨. 남은 걸로는 일단 코스터를 만들어볼 생각이긴 한데....
이런 식으로 버릴 옷으로 다른 걸 만들어보자고 생각만 엄청 하고 있는데 정말 내가 해본 것 중에 실력 없으면 인풋 대비 아웃풋이 너무너무너무 안좋은 노동 원탑이다. 진짜 하나 사고 말지!!!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그렇다고 2만원짜리 옷을 전문 업체에 5만원 이상 주고 맡기기도 그렇고.
어릴 때 가정 시간에 수세미 뜨기랑 반바지 만들기 배우긴 했는데 실생활에서는 너무 쓸모가 없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긴 어려워도 CA나 방과후 활동으로 헌 옷 리폼 수업 이런거 좀 필요할 거 같다. 구멍난 양말 기우기, 떨어진 단추 다시 달기, 고장난 지퍼 교체하기..... 과잉생산 시대에 넘 꿈 같은 소리긴 한데 그래서 더욱 필요하지 않나

옷 같은 거 사려고 몇 시간동안 쇼핑몰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존나 허망해진다. 뷰티 유튜브 볼 때도 마찬가지임.
볼 때는 재미있고 신기한데 계속 보다보면 가슴이 막 답답해졌다가 결국 꺼버리게 된다.
방금도 무신사 네시간동안 보다가 그래도 뇌에 힘 줘서 소비 안했다.

쇼핑 안하기, 옷장 정리하기, 쇼핑과 심리에 대한 유투브도 많이 봤지만 결국 내가 옷을 더 안 사려면 나한테 딱 맞는 기본템을 갖춰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겨울이라고 치면
1. 검은 색 가디건
2. 적당히 골반 덮는 길이의 검정 맨투맨
이거만 있어도 가디건 안에 나시나 크롭탑 겁나 돌려가며 입으면 되고 검정 맨투맨 아래에 바지 돌려가며 입으면 된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가디건은 옆이 겨드랑이까지 트여있어서 핏이 어정쩡하기도 하고 맨투맨은 약한 크롭이라 하이웨스트 바지 아니면 만세하면 배가 보인다. 티셔츠와 레이어드도 어색하고 길이 맞는 게 없음

여름 옷은 이제 진짜 너무너무 많아서 내년엔 진짜 안 사도 될 거 같다. 내년 목표를 여름 옷 안 사기로 해버릴까? 진짜 나 옷 있을만큼 있네 생각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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