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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루

0. 백지공포 .0

0과 1로만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조금 더 나을 줄 알았는데
희게 보이는 게 텅 빈 종이가 아니라 무수한 빛이 일렁이는 어떤 장소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디지털 세대인 나는 종이에 쓰는 것보다 손으로 더듬고 두드려 쌓아 나가는 게 더 익숙하다고 여겼지
네가 떠나는 것이 분명하게 다가올 사실인 걸 외면하다 이제 나를 묶으려고 이곳으로 도망쳤고
너에게만 말하던 것을 삼켜 체하는 대신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는 텅 빈 빛무리에서 헤매게 됐어
아직 거기 남아있다면 그가 내게 메아리 같은 말을 흘려줄수도 있겠지
나는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고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랑하는 걸 어려워해 너도 알고 있지
글을 쓰면 죽고 싶어져 아니 죽고 싶을 때만 글을 써 나는 네가 내 안에서 죽었길 바라며 글을 써
글자가 낱낱이 부서져 희게 녹아 사라지는 환영을 보게 돼
아픔으로 생의 요연함을 확인받는 사람은 지금 바로 이 순간 네가 떠난 것도 떠난다고 한 것도 내가 떠나라고 한 것도 아닌 지금 최고로 아프길 바라
이다음에 올 파도는 조금 부드럽길 바라고 내가 죽지 않을 만큼만 살고 싶게 만들 정도기를 기도할 뿐이야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던 것이 누군가를 아프게 할 테고
나는 네가 그러니까 정확히는 네 안에 있는 내가 행복하길 원해
그동안 네게 쏟아내던 내 삶은 자글자글한 빛이 모인 이곳에 점점히 박히겠지
그리고 나는 백지를 떠다니는 유령으로 질기게도 살아가게 될거야
어차피 모두가 떠돌다 사라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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